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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관령(大關嶺)을 넘어 귀산(龜山)에 유진하였다. 공도 여기서 비로소 회정(回程)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자못 용호가 응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 이때, 날씨는 차서 살이 얼어터지는데, 또 영서(嶺西) 지방 험한 길에는 얼음 과 눈이 쌓이고 주민들은 희소하여 군사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어렵게 식사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방림에 돌아와서는 군사 수백 명이 집합되어 지평에서 일으켰던 군사에 비할 만하 였다. 고을 사람 이원하(李元厦)와 조준교(趙駿敎)가 종군하였다.[원하의 자는 치택(致澤)이요 평 창 사람인데, 원래 총을 잘 쏘았으며 용모도 준수하였다. 그러나 무식하고 또 욕심이 많았 다. 갑오년에는 동학당에 참가하였다가, 엄문환(嚴文煥)이 마침 평창 원이 되었으므로 그에 힘입어 살아나게 되었는데, 후에 문환이 잡히게 된 것은 원하가 실상 힘을 썼기 때문이라 사람들이 이것으로써 나쁘게 보기도 했으며, 원주에 유진하였을 때에는 간사하고 횡포하니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또 후에 적에게 잡힐 때에는 먼저 자수하고 발붙일 계획을 하 니 적이 거짓 허락하고 잡아 죽였으며, 죽을 때에는 여러 모로 애걸하였다 한다. 준교는 담론(談論)을 잘하고 글도 대강 읽었으며 모습이 호걸다웠다. 공이 이때 매우 고독하여 좌 우에 없으므로 그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을 같이 하자고 청하였더니 준교가 응락하 였다. 후에 군사(軍師)로 대우하였는데 경솔하고 거만한 언동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좋 아하지 않았으며 또, 자신의 편리만을 일삼았고 내세울 만한 공적도 없었다. 그러나 의에 호응하여 종군했고, 또 원하와 함께 죽을 때에는 얼굴을 바로 들며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한 마디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말이 없었음.] 원주 치악산 구룡사(九龍寺)의 중 무총(武總)이 와서 인사를 드리므로 승장(僧將)으로 임명하고 승군을 징발하여 돕게 하였다. ○ 병술일(20일, 양력 1896년 2월 3일;편자 주), 영월부(寧越府)에 들어갔다. 군사들이 풍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흩어져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전번 단양에서 소란을 피운 이래로 규율이 아직 서지 않고 또 군사를 일으킨 초창기(初創期)에 갑자기 군법을 시 행할 수도 없었다. 이필희가 ‘이춘영은 곧 지평 고을의 양반 집안이요, 또 군사들이 원래 그에게 붙어 따른 사람들이다’ 하여 드디어 군사에 대한 지휘권을 맡겼다. 그리고 도로 영 을 넘어 영춘(永春)으로 왔다가 영월로 들어왔다.[서암(恕庵)의 말임.] ○ 여러 장수들이 우리 의암 류선생(毅庵柳先生)을 추대하여 대장이 되어 주기를 청하니 선생이 허락하였다. 이때 류선생이 방림(芳林)에서 공과 함께 영월에 왔는데, 공이 여러 장수들과 모여 의논 하고 추대하여 대장이 되었다. 선생은 성재(省齋) 선생의 당질(當姪)인데 학문과 도덕 이성 재 문하에서 제일이었다. 춘천에서 제천 구탄(九灘)으로 와서 우거(寓居)하였다. 성재가 세 상을 떠나니 여러 선비들이 성재를 섬기던 예로 선생을 섬겼으며, 선생도 학술을 강습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