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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어 죽일 수 있다.’는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의사(義士)가 하나도 없음을 슬퍼한 나머지 성패 를 가리지 않고 크게 외치고 궐기한 것이다. 더구나 국모의 원수는 토벌하지 않을 수 없 고, 임금의 수모는 설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옛날 한고조(漢高祖)는 학술에 어두워 서 매양 자기가 황제된 것이 삼걸(三傑)의 공인 줄 만 알고, 의제(義帝)를 발상(發喪)케 하 고 대의를 밝힌 공이 민심을 고동하고 흥기하여 강한 초(楚)나라를 넘어뜨린 것을 몰랐 다 9) . 지금 왜적이 비록 강하지만 어찌 초나라만이야 하겠는가. 우리가 국모의 원수와 임금 의 치욕에 있어 이를 가는 것은 바로 5백 년 동안 북돋우며 기른 정기(正氣)의 발로이니 어찌 저 의제처럼 난리 틈에 잠시 임금으로 세웠다가 몇 해가 못 가서 흩어져 버린 데 비 할 것이랴. 이로써 본다면 적은 반드시 섬멸되고 양(陽)은 반드시 펴는 것이 원리이니 비 록 마을 농부라도 맨몸뚱이를 들고 앞서 나가 적을 때릴 것인즉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랴. 또 왜적의 무기가 매우 정묘하다고 하지만 두렵다고 과장하는 자는 모두 적과 가까운 자 들이다.” 공의 말이 매우 긴요하고 절실하니 듣는 사람들이 몸을 바로하고 다시 생각하였다. 밤에 는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사(先師)의 ≪환성잠(喚醒箴)≫과 ≪구용구사찬(九容 九思贊)≫을 외고 또, 송(宋)나라 여러 어진이 10) 들의 잠(箴)·명(銘)을 외며, 몸소 신을 삼을 때도 있으므로 부하들이 모두 감복하며, 그만 두라고 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옛날 전단(田單)이 삿자리 짜던 일을 그대들은 듣지 못하였는가.” 하고 대답했다. [평창은 산협 고을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의 언사와 용모를 보고 감동하 여 일어나 앞을 다투어 모여들었다.] ○ 임오일(16일, 양력 1896년 1월 30일;편자 주), 방림(芳林)에 유진하였는데, 민용호는 벌써 진부(珍富)로 들어갔다. 공이 평창읍에서 떠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들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달려 들어갔는데, 이때, 신이백(辛二白)이라는 이가 막하에 있어 부지런히 사무를 봄으로, 공은 신임하고 깊 이 들어갔다. ○ 계미일(17일, 양력 1896년 1월 31일;편자 주), 진부에 유진하였는데, 용호는 벌써 대 9)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창업의 공신으로 찬양한 세 인물은 장량(張良)·소하(蕭何)·한신(韓信)이다. 그런데 하사 안공은 한나라가 강한 진(秦)나라를 쳐부수고 창업하게까지 된 거기에는 강한 진나라에 의하여 억 울하게 죽은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위하여 발상하고 일어선 그 대의 명분의 작용이 더 컸음을 강조한 것이다. 10) ‘염락’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이 살던 곳을 말하는 것이다. 즉, 주돈이(周敦頣)가 살던 염계(廉溪), 정호(程顥)·정이(程頣)가 살던 낙양(洛陽)을 합하여 ‘염락’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또 장재(張 載)가 살던 관중(關中), 주희(朱熹)가 살던 민중(閩中)을 합하여 ‘염락관민’이라 부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