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page

173 적이 전암(奠岩)에서 바로 제천 관아(官衙)로 들어오므로 공은 나가 치려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힘써 말리며 “일이란 만 번 튼튼히 해야 하는데 적은 반드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만 일 한 번 잘못된다면, 대세에 영향이 미치는 것이라,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하는 일은 다시 가망이 없으며, 또 제천은 처음 일을 시작한 곳으로 백성들이 의거에 호응하여 추앙 받을 만한데, 만일 부딪쳐서 난리터를 만든다면 인명의 피해가 많고, 우리도 의지할 데가 없게 되니 피하여 서로 보전해서 멀리 계획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공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지곡(芝谷)으로 들어갔으니, 이는 장차 북쪽으로 나갈 계 획을 한 것이요, 또 적이 만일 흉악을 부리더라도 북쪽에는 험한 곳이 많아서 소용이 될 만하기 때문이었다. 이 날, 나는 풍기에서 지곡으로 돌아와서 공을 만났다. [영남 사람들이 떠들기를 “우리 군사 한 부대가 제천에서 청풍으로 와서 적과 싸웠는데 승패는 모른다.” 하므로 제공(諸 公)은 공이 실패하지나 않았는가 의심되어 나와 이풍림(李豊林)으로 하여금 가서 보고 알 리게 하므로 나는 하룻밤을 자고 제천에 오니 인심이 매우 소란하였다.] 이날 밤에 지곡에서 다시 북쪽으로 나가 주천(酒泉)에 진을 머물렀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관동지방에 산포수가 많아서 모집하면 우리 세력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인즉, 보잘 것 없는 무리들과 다투며 공연히 기회를 잃을 필요가 없다 하므로, 공이 그렇게 여겼다. 또, 제천에 있을 때, 날마다 박운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올 것을 기다렸는데 끝내 오지 않 았다. 이것은 여주(驪州)의 민용호(閔龍鎬)가 공이 원주로 가면서 모든 군사 일을 운서에게 부탁했다는 말을 듣고, 운서를 달래되 “안장군이 자기더러 운서를 데리고 와서 모이게 하였다.” 하고 사칭하니 운서가 그의 말을 믿고 좇았는데, 용호는 그만 그 군사를 빼앗아 가지고 강 릉(江陵) 쪽으로 간 것이다. 공이 제천에서 적을 만나자 용호와 함께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주천에 와서는 용호가 벌 써 평창(平昌)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친히 가서 만난 다음 제천으로 가려 하였다. 이 때 공이 단양에서 거느리고 온 군사는 다 도망가고, 새로 모은 제천 군사는 수백 명을 넘 지 못하였다. ○ 기묘일(13일, 양력 1896년 1월 27일;편자 주), 주천에서 평창군으로 들어가 진을 머물 렀다. 이때에는 주로 군사를 모집하고 군기를 수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