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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니까.” 하니, 민이 말하기를 “공은 한낱 선비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나, 임금의 명을 받은, 자유가 없는 몸인데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므로 범직은 “공이 비 록 강원도 26읍의 도백이라 하지만 정말 가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소.” 하고 한탄하며 돌 아왔다. 신지수(申芝秀)와 함께 압록강을 건널 때에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고, 다시 본 국으로 돌아와 초산(楚山) 땅에서 적에게 살해되었다. 지금까지 친구들이 칭찬하며 애석하 게 여김.] 정오에 적이 장회협(長滙峽)으로 들어오는데 이곳은 강변의 험한 지대라 적이 다 들어온 후에 발포하기로 하였다. 적이 들어오자 그 선발대가 우리 군사에게 공격을 가하므로 잠복 하고 있던 우리 포병이 일제히 포를 쏘아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래서 얼마 동안 격전한 끝에 적이 당해 내지 못하고 마침내 시체를 버리고 상한 군사를 부축하여 달아났 다. 우리 군사들 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려 하였는데 마침 날이 저물고 날씨마저 차고 또 사졸들이 주리고 피곤하여 그만 중지하니, 적이 김익진을 호위해 가지고 제천으로 들어갔 다. 그 후에 또 제천에서 영남으로 가면서 마음대로 횡행했다는 것이다. ○ 공은 제천에 있으면서 단양의 승전 소식을 듣고 본부(本部) 장졸들을 격려 권장하였 다. 이때 원주·제천 군사가 한 사람도 단양으로 와 모인 일이 없고, 공도 제천에 있으면서 미처 군사를 발송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단양의 싸움이 있어 다행히 적을 격파하기는 하 였지만 싸우는 군사들은 모두가 지평 사람이라 자기들만이 수고하는 것을 원망하며 저녁 식사도 받지 않고 서로 어지러이 떠들면서 이미 영남지방에 가까이 왔으니, 밤으로 죽령을 넘어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세력을 크게 한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는다 면 병세(兵勢)가 단약(單弱)하여 반드시 좌절될 것이니 일찍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들 하니, 여러 장수들도 그 계획을 옳게 여겨 밤에 남쪽으로 행군하여 이튿날 군 사가 풍기(豊基)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이때, 공은 제천에 있으면서 아직 이 일을 들어 알지 못하였으며 장회의 승전이 군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킨 것으로써 새로 모인 군사들에 게 상을 주어 권장 격려하였다. 나는 이풍림(李豊林)과 함께 남쪽으로 풍기를 향해 떠났다. ○ 무인일(12일, 양력 1896년 1월 26일;편자 주), 적이 다시 제천으로 들어오니 공이 옮 겨서 북면지곡(北面芝谷)에 유진하였다. 이때 적의 도당 군수 익진이 다시 제천 임소로 돌아와 가을 세납을 징수할 계획이 있었 다. 공이 그 동안 아직 군사를 정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서가 없어 마치 장꾼의 모임 같았고, 또 병기마저 모자라므로 공장(工匠)들을 불러 새로 만들던 중이었는데, 일이 절반 도 못 되어 갑자기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당(南塘) 어구를 지키게 하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