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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격문을 8도 여러 고을에 발송하고 먼저 경내(境內)의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격문은 주입 암(朱立庵)의 소작이다. 입암은 젊어서부터 과문(科文)을 잘 짓기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여 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마침 우리 선사가 신사년(고종 18년)에 벼슬을 주려는 것을 피하고, 인제(麟蹄) 설악산(雪岳山)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만나자, 과거 보는 일 을 단념하고 학문에 힘써 깨달음이 많았으며, 만년에 더욱 돈독하였음.] ○ 신미일(5일, 양력 1896년 1월 19일;편자 주), 밤을 가리지 않고 단양으로 들어갔다. 이때, 의병이 비로소 일어나자 적신들이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임금을 위협해서 서울 군사를 파송하여 말하기를 “창의(倡義)한다 일컫는 자가 있으면 두들기라.” 고 하였다. 적병이 내포(內浦)에 와서 네 고을 군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밤을 새워 달 려오므로, 제공은 단양이 지리가 험준(險峻)하여 제천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날 밤으로 떠났는데, 제천 사람들은 실상 알지 못하였다. 단양 길이 험하고 어두워서 주 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와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서상렬(徐相烈)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권숙 (權潚)[단양의 원]을 달래어 일을 같이 하자고 하며 말하기를 “공이 수암(遂庵)[유학자 권상하(權尙夏)의 호] 선생을 생각한다면 이를 갈며 중화(中華)의 도맥(道脈)을 보전하려 할 것이요, 첫 벼슬을 지낸 사람을 국란(國亂)에 나설 의무가 있음을 생각한다면, 소매를 걷고 원수 오랑캐를 의당 다른 사람보다 달라야 할 것인즉, 공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하니 권숙은 냉소하며 말하기를 “한위공(韓魏公)의 손자로도 탁주(侂冑)가 있었으니 8) , 우리 조상을 들어 말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 죄를 성토(聲討)하여 베려 하였는데, 공이 그 가 성주(城主)인 때문으로 차츰 보아서 처치하자고 하여 마침내 가두었다. [이때 기강이 이 미 무너지고 인심이 모두 상실되어 선악의 구별이 전혀 어두웠다. 제천은 의병의 처음이요 마지막인 고장으로 팔을 걷고 나선 장병이 제일 많았으나 부량배의 무리로 정우영(鄭禹永) [자는 연오(然吾)]과 같은 자는 개화를 과장하여 군침을 흘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소년들 을 유인하였고, 을미년 겨울에 삭발령(削髮令)이 제천읍에 도달하자, 군수를 찾아가 보고 위엄을 세울 것을 굳이 청하니, 그 날은 저자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꾸짖었다. 또, 김휘두 (金輝斗)[호는 학음(鶴陰)]와 같은 자는 원래 문한과 구변이 있어 세상을 내려다보며, 선현 8) 한위공 : 중국 송(宋)나라의 명정승 한기(韓琦)를 말하는 것이다. 한기가 송나라에서 명망 높은 대신이었 던 것과는 반대로 그의 증손 한탁주(韓侂冑)는 공을 믿고 방자하며, 금(金) 나라와 말썽을 일으켜 싸우 다가 패하니, 송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 그의 머리를 베어 함에 봉하며 금나라로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