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page

169 북쪽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안정되었음.] ○ 12월 기사일(3일, 양력 1896년 1월 17일;편자 주), 밤에 제천으로 들어가니 역적의 도 당 군수 김익진(金益珍)이 도망하였다. 처음에 우리 스승(의암 류인석;편자 주)께서 제천 장담(長潭)에 사시면서 강회(講會)와 향 음례(鄕飮禮)를 행하여 사문(師門)의 규례가 되니 사방에서 본을 받았다. 김규식(金奎軾)이 머리를 깎고 먼저 익진에게 통고하여 머리를 깎게 하니, 익진이 공문을 받은 그 이튿날로 흔연히 머리를 깎고 강제로 이속과 주민들에게 명령하여 따르게 하였는데, 유독 장담의 선 비들이 특별히 옛 법을 지키는 것을 미워하여 침해하고 업신여기기를 마지않으며 “먼저 장담 사람을 깎게 하면 그 나머지는 바람에 따라 휩쓸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공이 장담에서 문집 판각하는 일을 보살피는데, 입암(立庵) 주용규(朱庸奎)·경암(敬庵) 서상렬(徐相烈) 등 제공과 함께 “백배나 힘을 더하라.” 는 스승의 교훈을 준수하여 짐짓 자주 향음례를 실행하므로 익진은 더욱 앙심을 품었고, 공 도 이를 갈았기 때문에 먼저 제천으로 들어가니 익진이 정탐하여 알고 공이 관문에 들어설 무렵 가만히 빠져나와 충주(忠州)로 도망갔다. 공이 그 방에 들어가니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 무렵에 밤마다 방문(榜文)이 붙기를 ‘머리 깎는 자는 베인다.’ 하니, 익진이 미 워하여 그 하인들을 시켜 수직하게 하였으나 마찬가지라 끝내 그 단서를 잡지 못했음.] ○ 장담의 여러 선비들이 모여 일을 의논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이필희(李弼熙)로 대장을 삼고[필희는 덕수인(德水人)이요, 충무공 의 후손으로 지조와 절개가 훌륭한 무인 출신인데, 한 번 성재 선생을 만나 보고서, 무(武) 를 버리고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독실하기 비할 데 없었다. 여주읍(驪州邑)에 살다가 왜병 이 배를 타고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단양(丹陽) 산중으로 도망가는데, 몸소 어머니 의 교자를 메고 갔다. 그리고 산중에 들어가서는 손수 나무하고 치는 것이 농사지어 어머니 를 공양하며 밤이면 길쌈하는 등잔불 옆에서 글 읽고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상렬(徐相烈)로 군사(軍師)를 삼고[상렬은 달성인(達成人)인데 장신(將臣) 서문유(徐文裕) 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중장하고 굳세며 단정, 결백하고 재주와 기개가 남보다 뛰어났다. 무예를 배워 선전관(宣傳官)까지 되었는데, 성재 선생을 한 번 만나보고 문득 방향을 바꾸 어 학문이 정밀하고 독실하여 근세에 비할 이가 없었다. 드디어 가족을 데리고 장담으로 들 어와 조석으로 스승을 모셨기로 가장 깊은 뜻을 체득한 이는 많은 선비들 중에서 공이 제 일이었다. 서상렬의 호는 경암(敬庵)이요, 이필희의 호는 실곡(實谷)임]. 이춘영(李春永)으로 중군장(中軍將)을 삼고, 공은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