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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왜에게 유린을 당하자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갑오년 가을에 청나라 군사가 평양에서 패전하니 왜군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북 경(北京) 근방까지 들어갔다가 마침내 섬멸을 당하고, 한 진영(陣營)도 온전히 돌아오지 못 했으니 7) , 이로써 왜의 세력이 한풀 꺾었다. 이때 척신 민영준(閔泳駿)이 중국에 다녀와 여러 가지로 왜가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을 말 하여 드디어 왜를 배척할 계획을 하고, 8월 20일 후로는 검은 의복을 입은 자에 대해 대궐 출입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에 흉악한 무리들이 급히 왜적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일본개화 가 이 달 20일로 끝이 난다.’고 하니, 왜적이 국모를 원망하여 밤중에 대궐을 침범하는데 강제로 국태공을 앞세우고 궐문 앞에 당도하여 국태공이 입궐하신다고 외치니 마침내 문이 열리어 이내 변을 일으켰다. 본국 시위소(侍衛所)에서는 태공을 해치게 될까 두려워, 감히 발포하지 못하고 그만 국모가 해를 당하게까지 되었다. 이때 장신(將臣) 홍재희(洪在義)가 변을 듣고 달려가 싸우다가 몸에 탄환을 맞자, 배를 싸 매고 다시 싸웠다. 기력이 다하여 죽게 되자 집으로 돌아가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미천한 몸으로 대비의 은혜를 입었으니 함께 죽는다 해서 무엇이 한스러우리요.” 하며 가묘 (家廟)에 사직하고, 누워서 배에 감았던 헝겊을 풀고 세상을 떠났다]. 11월 15일에 또 왜적을 끌어들여 임금을 위협하여 먼저 머리를 깎게 하고, 그 다음으로 국태공 및 왕세자에게 미쳤으며 그 이튿날에는 널리 서울의 시정(市井) 군민(軍民)들을 머 리 깎고 따라서 전국에 영을 내려 성화처럼 머리 깎기를 독려하니 우리나라 역사 있는 이 래로 제일 큰 변고였다. [옛날에는 변이 순역(順逆)의 대립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기로 죄가 한 때에 그쳤으나, 금(金)·원(元)·청(淸)에 이르러 만세의 중화(中華)가 야만으로 전락되었으 니 지금은 왜적만이 유독 짐승이라 할 수 없다]. 적당(賊黨)으로서 주·현(州縣)의 관원이 된 자들이 각각 제 관내에서 늑삭령(勒削令)을 선포하여 위협했는데, 가까운 곳에서는 충주 관 찰사 김규식(金奎軾)[김신국(金藎國)의 후손], 제천 군수[원래는 현감이었음] 김익진(金益軫) [동래(東萊) 사람으로 왜말을 잘하여 통역을 직업으로 하던 자임], 엄문환(嚴文煥)[본시 영월 (寧越) 아전이었는데 갑오년 동학란 때 왜적에게 붙어 동학군을 많이 잡은 공으로 평창의 원이 되었음] 등이 더욱 극성을 부리므로 관하 인민들이 불타듯 물 끓듯 하며 속에 모두 분기(奮起)하려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감히 먼저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지평 고을에서 군사 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추운 겨울에 따뜻한 봄을 맞는 듯이 반가워하였다.[이때 인심이 흉흉하여 집을 버리고, 양식을 싸가지고 산골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천 7) 고종 31년 갑오, 즉 서기 1894년에 시작된 청·일 전쟁은 대개 일본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여기서 보 이는 ‘나중에 섬멸당하고 한진영도 살아서 돌아온 것이 없었다’는 말은 아마도 그 아래 보이는 청·일전 쟁 도중에 북경에서 돌아온 민영준의 말을 그대로 믿고, 또 일본을 깔보는 생각에서 그렇게 전하여졌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