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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砲軍) 수백 명을 양성하였으므로 지평 고을에 명포수가 많았는데, 동학당(東學黨)이 일어나 게 되자 맹 감역이 포군(砲軍)을 동원하여 토벌하고, 그 공으로 지평현감이 되었다. 삭발(削 髮)하는 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할 생각을 가지지 않으므로 공은 먼저 그의 부하 김백선 (金伯善) 등에게 대의(大義)로써 격동하고 그 군사를 빼앗았다.] 그래서 원주로 달려가니 군 수[원래는 판관(判官)이었는데 이때 와서 왜(倭)의 직제를 따라 주·현(州縣)의 관장을 모두 군수(郡守)라 칭하였음] 이병화(李炳華)가 도망하였다[이병화는 명년 정월에 머리를 깎기로 했다 함]. 고을 사람 김사정(金思鼎)[진사(進士)]으로 총독(總督) 소모장(召募將)을 삼고, 박 운서(朴雲瑞)로 도령장(都領將)을 삼아, 원주 군사를 더 일으켜 제천(堤川)으로 모이게 하였 다. 이때에 탐음(貪淫)하는 척신(戚臣)이 권세를 부리고, 적신(賊臣)[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 濬)·어윤중(魚允中) 등]이 등용되자 외국 형편을 과장하여 임금을 공갈위협하며, 이를 빙자 하여 정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임오년 군란(軍亂)이 있은 후로[임오년 6월에 관군이 난을 일으켜 중전 민비(閔妃)는 충주 장호원(忠州長湖院)으로 피란하였으며, 군사들은 흥인군(興寅君) 이하 대신들을 많이 죽였 다. 청나라 임금은 이 소식을 듣고, 장수 오장경(吳長慶), 정여창(鄭汝昌), 원세개(袁世凱) 등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감시 호위하며 난병(亂兵)들을 잡아갔고, 정여창은 또 청나라 임금 의 명령으로 국태공(國太公)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잡아 뱃길로 천진으로 들어가 감 금 구류하였다가 3년 만에 놓아 보냈다] 청나라 장수 원세개가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나라를 감시하매 매우 국민들의 추앙을 받으니 [이때에 왜·양 여러 오랑캐들이 천하에 날뛰 니 국민의 어리석은 자는 두려워하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선동하였다. 그러나 원세개 장 군을 꺼려서 침만 흘리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 깎는 화가 원장군 이 떠나간 후부터 시작되었으니, 대개 그놈들이 갑신년 10월 변란에서 기운이 꺾였던 때문 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0월 변란에 벌써 이 화가 있었을 것이다.] 개화를 주장하는 척신 (戚臣)들이 불평을 품고, 왜병을 불러 들여 원장군을 내쫓고 왜놈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임 금과 국태공 및 세자(世子)를 육박하였다. 이로부터 왜적의 세력은 덩굴 뻗듯 하여 주동이 되고, 적신들은 큰소리치며 그들의 당이 되어 자주 독립의 연호(年號)를 씀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의관·문물(文物)과 전장(典章)·법도 를 일체 쓸어버리고, 모두 왜의 제도를 따랐다. 먼저 큰 소매가 달린 도복을 금하고 검은 주의(周衣)를 선비와 백성들에게 독려하여 입히면서 ‘일본개화’라 하고 10부(部) 대신을 두 어 그 일들을 맡게 하였는데, 을미년 8월 20일에 이르러 적신들이 왜를 끌어들여 변란을 일으켜 왕비가 왜국 개화를 배척한다는 구실로써 시해(弑害)하고 그 시체를 불태워서 자취 를 없이 하였다.[앞서, 국모께서 척신들의 말을 듣고, 왜를 불러들여 청(淸)을 내쫓았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