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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들을 꾀어, 가는 곳마다 도당을 만들어 방자하고 횡포하여 전국에 없는 곳이 없었음]들이 갑자기 들어와서 형세가 극히 위태로워지므로, 미리 누설되어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어 그만 중지하고 말았다. 얼마 뒤 공이 감악산(紺岳山 ; 제천 북쪽에 있음) 백련암(白蓮庵)에 있을 때 왜(倭)의 추장 이 대궐에 들어가서 강제로 개화(開化)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 목을 놓아 통곡하니 그의 남다른 행동이 대개 이런 것이었다. 선사(先師 ; 류성재를 말함)께서 세상을 떠나자[계사년 3월 19일] 나는 선생의 영위에서 가만히 공의 애통하는 것을 보니 곁에서 보아도 몹시 비참했었다. 때에 선생의 유고(遺稿) 가 광주리 속에 있었는데 전혀 간행할 길이 없었다. 공이 “선사의 글은 유학(儒學)의 도를 밝히는 것이니 어찌 보통 문자로서야 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실로 오늘에 있어서 사특하고 굽은 학설을 막는 큰 명맥(命脉)이니, 발간 반포하는 일을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다. 비록 비용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힘을 다해 나가면 호응 하는 이가 없을 것이랴.” 하고 비로소 출판국을 장담(長潭)에 설치하였는데, 일은 크고 힘은 부족하여 거의 중도에 폐지하게 되었더니 공의 도움으로 판각하는 일이 절반이나 진척되었을 때 불행히도 병란을 만나 그만 중지되었다가 뒤이어 해서(海西 : 황해도)에서 이루어지니 유집(遺集)이 간행됨에 는 실로 공의 힘이 많았다. 이춘영(李春永)의 자는 우삼(友三)이요, 호는 괴은(槐隱)이니 택당 선생(澤堂先生)의 9대손 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공부에 힘썼으며 가사를 돌보지 않았다. 성질이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고 도량이 넓어 계획하기를 좋아하며 바른 말을 잘 받아들이고, 담기와 용맹이 특 출하였다. 갑오년(1894년;편자 주)에 왜놈들이 가는 곳마다 득실거리어 큰 소매 달린 옷을 금지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휩쓸려서 감히 예전 의복을 입지 못하였는데, 공은 여전히 도포를 입고 왜군의 진 앞을 지나면서 하사(下沙)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오랑캐놈들을 개미새끼처럼 본다.” 고 하였다. 그러나 몸가짐은 진실한 선비라 조금도 거친 행동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님을 섬기되 효성이 극진하여 다만 잘 봉양할 것만 알고, 영화나 이익에 급급한 생각은 갖지 않 았으며 집안 살림은 가난하지만 남을 구제하는 일이 매우 많으니 온 고을이 칭송하였다. 그 의병을 일으킨 사실은 나의 친구 이석영(李錫永)이 자세히 말하였다. 대개 이 두 분은 모두 우리나라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드디어 죽음을 맹서하고 적을 토벌하기로 하여 지 평(砥平) 땅에서 군사를 일으킨 지 몇 날이 안 되어 군사 4백여 명을 얻었다. [이보다 앞서 감역 맹영재(監役孟英在)가 지방 비적(匪賊)을 방어하기 위하여 계(契)를 만들어 화포군(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