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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개인의 창의록임과 동시에, 의병 항쟁의 발단과 진행과정 및 제 1기 의병의 최후의 상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참고가 되는 책이다. (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상권]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원문 생략) 동문(同門) 죽산 박정수(竹山朴貞洙) 기록 원주(原州) 원용정(元容正) 교열 ○ 명(明)나라 영력황제(永曆皇帝) 6) 249년(고종32 ; 1895) 가을에 왜적이 적신(賊臣)들과 결탁하여 국모(명성황후)를 시해(弑害)하고 또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으며, 온 국민을 협 박하여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깎게 하였다. 11월 갑자일(28일, 양력 1896년 1월 12일;편자 주)에 공(안승우 ; 安承禹)이 이춘영(春永) 과 함께 지평(砥平) 고을 군사들로써 창의(倡義)의 깃발을 원주 땅 안창(安倉)에서 들었다. 28일. 공의 성은 순흥 안씨(順興安氏)요 이름은 승우(承禹)이며,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 (下沙), 문성공 유(文成公裕)의 후손이요 동오 광욱(東塢光郁)[벼슬은 익찬(翊贊), 병자호란 때의 명신]의 9대손이다. 대대로 지평현 상동면(上東面, 지금의 양평군 양동면;편자 주)에 살았는데 전대에서부터 숨어 살며, 호학(好學)으로써 가법을 삼아 왔다. 공은 또 성재(省齋) 류선생(柳先生,류중교;편자 주)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많은 칭찬을 받았 으며, 당시 동문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가 총명정직하여 스승의 교훈을 독실히 믿으며, 뛰어나게 조예가 정밀했음을 칭찬들 하였다. 일찍이 영월부(寧越府)에 가서 노능(魯陵)[단종 의 능]의 유적을 참배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수일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갑오년(1894년;편자 주) 여름에 왜병이 경상도 진영으로 많이 들어와 장차 서울로 가려 한 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7백여 명이나 되었다. 마침 동학당[요술꾼 성두한(成斗漢)이 주문 외는 법으로써 동학이라 일컫고, 어리석은 백성 6) 영력 황제 : 중국 명나라의 맨 나중 임금인 영명왕(永明王)을 말하는 것이며, 영력은 영명왕의 연호(年 號)다. 영명왕[계왕(桂王)이라고도 하였음]은 서기 1646년에 즉위하고 이듬해에 영력 연호를 사용하였 는데, 영력 16년에 영명왕이 운남(雲南)에서 오삼계(吳三桂)에게 살해됨으로써 명나라의 국맥(國脉)은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우리나라의 일부 유학자들 사이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우리나라를 구원하여 준 은혜를 잊지 않는 의미에서, 이 명나라의 최종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 였던 것인데, 고종 32년 을미는 곧 영력 원년으로서 249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