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page

164 라. 양평의병연표 참고문헌 등 자료 (1).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상)』, 박정수:〔F자료1〕 (가).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해제) 이 책은 박정수가 엮고, 원용정(元容正)이 교열한 것인데, 정중하게 해서로 쓰인 원본을 하사(下沙) 안승우(安承禹)의 후사(後嗣)가 70년 동안 조심스럽게 간직해 온 것이다. 안하사 는 이운강처럼 의병전을 장기간 싸우지도 못했고, 또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도 못했으나, 초 기 의병 항쟁에 있어서 류의암을 총수로 하는 의병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여 왔고, 또 이 춘영(李春永)과 같이 의거를 제일 먼저 부르짖은 주창자라는 데에 남다른 위치가 있다. 을미사변 후에 시국을 개탄한 나머지 동향인 지평(砥平) 사람 이춘영과 굳게 맹서하고 의 병을 일으켜 을미 12월 3일에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상렬(徐相烈)을 군사 (軍師)로, 이춘영을 중군으로, 자기는 군무 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어 군용(軍容)을 정비하 고, 친일 매국 역당의 앞잡이 장기렴(張基濂)의 군대 및 왜적의 무리와 혈전을 시작했었다. 첫번 싸움은 단양(丹陽) 장회협(長滙峽)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12월 20일 경에는 영월(寧越)로 들어가 의암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정월 3일에는 충주를 함락하여 관찰사 김규식(金奎軾)과 단양(丹陽) 군수 권숙(權 肅), 청풍(淸風) 군수 서상기(徐相嗜) 등을 무찔러 의병대진의 위엄을 떨쳤다. 그러나 같은 달 11일에 수안보역에서 장기렴 군에게 패하여 중군장 이춘영이 순국하고, 17일에는 주용 규(朱庸奎) 등이 순국하는 등 실패를 거듭했다. 그는 이춘영의 뒤를 이어 중군장이 되어, 동년 4월 13일 제천 싸움에서 전사할 때까지 의암이 통솔하는 의병대진에서 병권은 사실상 그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천 전역에는 청국 사람 여국안(呂國安) 등의 용맹지략으로 일진일퇴하면서 적 32명을 도륙하는 등 많은 전과를 얻었으나, 돌연히 쏟아지는 흙비와 폭 풍으로 말미암아 화승총을 쓸 수 없게 되어, 그와 그의 제자 소년 홍사구(洪思九) 등은 장 렬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이 제천 패전을 계기로 의진은 전의를 상실하고 류의암 일행은 이어 요동으로 향하게 되 었다. 선발대로 행군하던 서상렬은 6월 12일 낭천(狼川)에서 전사하고, 의암의 행군은 압록 강을 건너 만주 회인현(懷仁縣)에 이르렀으나 부득이 군대를 해산하여 귀국하려 하고, 의암 과 수행원 22인이 심양성(瀋陽城)에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뜻과 같지 않아 박정수·정운경(鄭 雲慶)·이종호(李鍾浩) 등 3인은 산해관을 넘어 천진 쑈잔(小站)에 도착하여 원세개에게 원조 를 구했으나 역시 결실을 얻지 못하고, 병신년(1897) 봄에 고국에 돌아오니 무릇 10개월간 에 8천5백3십 리의 행정을 거쳤는데, 이 같은 기록을 적어 놓은 것이므로 이 책은 안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