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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 정미의병항쟁지 삼산리전투 표석 1908.4.3자ㆍ『해조신문』1908.4.16자 〔F자료6, 311쪽〕 3.31양근의병 윤공필(尹公弼, 출신이나 활동상 등이 밝혀지지 않은 의병장; 편자 주) 등 판결 〔✒전거〕:「고종시대사」 1908.3.31자 〔F자료6, 310쪽〕 3. 이강년, 민긍호 등이 영솔한 군병이 도합 4,5만 명인데 경기, 충청, 경 상, 강원, 황해 다섯 도로 근거를 삼고 일제히 맹세하고 서울을 습격 하려 하여 세 길로 나눠 들어가는데 한 길은 포천, 연천으로 양주를 향 하고 한 길은 여주, 이천, 양근으로 광주를 향하고 한 길은 양주, 적성 으로부터 장단, 파주, 고양으로 향 하여 일제히 경성을 칠 계획(『해조 신문』은 1908년 2월 26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되었던 일 간신문으로 1908년 5월 26일 폐간 하였으며, 본 기사는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을 뒤늦게 보도한 것으 로 보임;편자 주) 〔✒전거〕:『해조신문』 1908.3.14자 〔F자료6, 309쪽〕 4.4의병, 양근군 상동면에 의병 가입 및 곡류 보관 등을 명령하는 격문 3 통을 띄움 〔✒전거〕:『양평의향지』 608~618쪽 〔F자료7, 321쪽〕 4.10김춘수 부대 20명, 양근군 북면에 와서 화약 등 군수품 조달을 명령하 는 격문 2통 유포 〔✒전거〕:「양평지역후기의병(1905~1910)」 ‘양평지역 후기의병의 활동일지’홍영기 〔자료8, 321쪽〕 양근군 북면에 나타난 의병장 김춘 수(金春洙) 등 십여 명 중에서 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