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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89 ◦後 鋒 將 徐鍾洛 ◦左 營 將 李景久 ◦右 營 將 金泰彦 ◦練 習 將 李圭弼 ◦都 炮 將 白南信 ◦左 翼 將 鄭致宇 ◦右 翼 將 鄭來儀 ◦左 炮 將 李世紀 ◦右 炮 將 鄭完成 ◦將營執事 崔基輔 ◦軍門執事 李斗圭 산남의진은 고종의 하사금 5만냥과 허위가 제공한 퇴관관료의 모금 2만 냥을 군자금으로 확보하고, 군가를 제작하여,182) 의진의 사기를 진작시키니 진세는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경상도를 망라하여 산남의진이 크게 진세를 펼치며 활동하 게 되자 일본의 조종을 받던 정부는 이를 효유‧해산시키고자 하였다. 그 러나 정용기는 호응치 않고 신돌석과 연결하여 경북 동해안 지역까지 활 동 범위를 넓혔다. 1906년 4월 28일(음) 신돌석의진이 영해에서 토벌군에 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 해 진군하던 중,183) 신광면神光面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의 간계에 속아 체포당하게 되었다.184) 결국 산남의진의 1차 활동은 창의장 정용기의 피체 이후 중군장 이한 구의 인솔하에 약 5개월간 영천‧강구‧청하 등지에서 신돌석의진과 연락 하면서 활동하다가 상황이 불리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해산하였다.185) 청송지역에서는 산남의진 창의 초기인 음력 3월과 4월 서종락‧남석우 南錫佑‧남석인南錫仁‧남석헌‧김태언金泰彦‧조태초‧오상영吳相泳 등이 참가하 였다. 그 중 산남의진의 부서장으로 추대된 인물은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우영장 김태언‧좌포장 이세기李世紀 등이었다. 산남창의지 182) <行狀>, 「附錄」, 國譯 許蔿全書 卷二, 亞細亞文化社; 裵勇一, 「山南義陣考」, 《浦港專門大學論文集》第6集, 1982. 183) 山南倡義誌 下, 18쪽. 184) 山南倡義誌 下, 19쪽. 185) 山南倡義誌 下,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