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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79 방산은 고향에서 진보 흥구로 귀가하여 1896년 2월 25일경(양력 4월 7일경) 창의하였다. 진보의진의 창의장은 방산 허훈이고, 부장은 신상익이었다.146) 부장 신상익(1852∼1919)은 청송군 중평리 출신이다. 자는 경보敬輔, 호는 가천可川, 본관은 평산으로 1882년 사마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896년 주변 고을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진보향교에서 방산을 도와 창의 하여 의진의 업무와 전략을 주도하였다.147) 그의 아우 왕산은 김산에서 창의하여 관군과 접전하여 패한 뒤 직지사 에서 재기를 도모하고 있을 때였다. 방산은 진보 흥구의 우거지에서 안동 의진 창의장 권세연의 독려로 의리를 앞세워 창의의 기치는 걸었으나 전 투를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우선 방산은 아우 허겸을 김도현에게 보내 진보의진으로 초청하였다. 허겸은 방산의 아우이자 왕산의 형이었다. 처음 김산의진에 참여하였다가 이 무렵 방산을 돕기 위해 진보로 들어온 것 같다. 방산의 초청에 응한 김도현도 진보에 들어왔다. 그러나 김도현은 장차 안동의병을 얻어 남으 로 가서 소모하기로 하고 허겸과 함께 안동의진으로 돌아갔다.148) 1896년 청송의진의 진중일기인 적원일기 에 의하면, 진보의진은 창의 후 어천‧남면 화마리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청송‧영양‧의성 등 주 변 의진과 사통을 교환하며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149) 특히 감은리 전투 후 진보의진은 영양‧청송의진과 합세하여 의성의진을 응원할 계획 146)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5일 및 3월 초10일자. 147) 申相翼, <行狀>, 「附錄」, 可川集 單; “丙申自 上有綸旨, 播示中外, 公乃不 勝憤激, 會衆于鄕校, 誓以義擧, 推公以將轚之望, 公讓于舫山許公, 自爲副席, 懽然相得, 機務籌策, 無不相與措劃, 軍聲大振, 虜不敢入境, 傍郡諸陣, 亦皆 賴以爲關防焉”. 148)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집, 독립운동사편찬 위원회, 1970, 721쪽. 149)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5일 및 3월 초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