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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77 어 받았다. 방산은 29세에 김해부사로 부임한 허전의 문인이 되어 허목과 이익으로 이어지는 근기남인의 학풍을 계승하였고, 나아가 서애 유성룡의 학통을 계승한 유주목의 문인이 되어 영남학파의 학문도 섭렵하였다.144) 방산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왕산 역시 근기학파와 영남학파의 학문적 경 향을 두루 섭렵하여 지식주의‧실용주의를 익혔다. 1896년 방산은 아우 왕산과 함께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중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을미년(1895) 12월 6일, 즉 양력 1896년 1월 20일 안동에서 권세연‧김도화‧김흥락‧유지호柳止鎬 등이 창의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왕산의 형제들은 고향인 선산 임은에 돌아와 있던 중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즉 방 산에게 편지를 보내 창의를 독려하였던 것이다. 이에 방산은 권세연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고 있다. < 權祖源世淵에게 答함- 丙申> 성명은 벌써 익숙히 들었어도 한 번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 더니 뜻밖에 보내주신 편지를 받아 펴들고 읽고 감사하고 황송한 마음 비할 데 없었습니다. 요즘 날씨가 몹시 추운데 신의 가호를 받아 존체 만안하시고 군성도 다시 떨쳐서 벽루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하니 휘날 리는 깃발을 늘 생각하던 심정이 더욱 간절합니다. 훈은 지난 겨울부터 병을 앓게 되고 또 느닷없이 사변을 만나 결국 달려가 뵙지 못했으니 지금까지 죄송스럽습니다. 요즈음 친산 면례를 위해 고향에 온지 벌써 20일이 지났습니다. 아이에게 부쳐온 존경스런 편지는 가르치신 말씀 이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명공께서는 훈에게 무엇을 취하려고 이토록 지극하게 여기십니까. 훈은 재주도 부족하고 지혜도 모자라는데 더구나 오랫동안 병을 앓고 드러누웠으니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스 스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쓸쓸한 한 모퉁이에 외로이 우접하여 다만 울 분한 심정에서 쏟아지는 눈물만 빈산의 초목에 뿌립니다. 그냥 이와 같 144) 許薰, 「家狀」, 舫山全集 卷二十三 및 李佑成, 「解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