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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조독호의 경우에도 ‘폐문자수閉門自守’하여 은거로 일관하였고,141) 중군 김 대락의 경우에는 의진해산 후 화능참봉和陵參奉을 거쳐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고 한다.142) 의병을 해산한 뒤 양반유생들은 대부분 은거하였다. 2. 진보의진 1896년 음력 2월 25일 경 결성된 진보의진은 1896년 음력 2월 25일경 방산舫山 허훈許薰이 결성한 의진이다.143) 허훈은 왕산 허위의 형으로 1894년 동학농민의 난을 피해 진보에 은거 하던 중 창의하였다. 방산은 가학에서 출발하여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 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근기학파近畿學派와 영남학파 를 계승하였다. 임은의 허씨가는 일찍부터 근기지방의 남인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입향조인 불고헌 不孤軒 허돈許暾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문하 를 출입하였고, 방산의 증조부 태초당太初堂 허임許恁은 채제공의 문인들 과 교유하였다. 허임은 18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 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던 대유 大儒였는데, 방산은 태초당으로부터 가학을 이 141) 趙篤祜, 「遺事」, 晦澗文集 卷四. 142) 義城金氏道谷公派世譜 . 143) 진보현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진보현은 폐지되고 6개 면 중 2개 면은 청송군에 편입되었고, 4개 면 32개 동은 영양군에, 나머지 1개 동 은 영덕군 지품면에 이속되었다. 그러나 진보현은 한말까지 독립적인 행정구 역이었다. 즉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昭憲王后의 본향인 靑鳧에 합쳐져 靑 寶郡이 되었다가 곧 진보현으로 복구되었으며, 성종 5년 청송부에 속했다 가 9년 다시 진보현으로 복구되어 1906년 진보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진보는 안동문화권의 중요한 일부로서 1914년 청송군에 통합되기 전까지 독자적인 행정구역이었고, 퇴계 이황을 배출하는 진성이씨의 관향이라는 점 때문에 퇴계학파의 적통으로 학문적 경향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