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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73 강제로 무기고를 수색하며 砲丁으로 협박 공갈함이 극에 달하였다. 이번 기회에 비록 의진을 설치하고자 하나 텅비어 행할 수가 없으니 저들의 욕심은 끝이 없을 것인데 장차 무엇으로 감당하며 우리를 지킬 것인가. 이어지는 격문은 하나둘이 아닌데 縣 五面에서는 아직 오는 사람 하나 없으니 장차 義理를 오랑캐와 같이 보며, 또 倫理와 綱常을 오랑캐에 맡 기자는 것인가. 우리 고을의 존망은 이 두 가지에 달려 있고, 人獸의 분 별은 이 거사에 달려 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그대들은 밤을 달려 함 께 자리하여 일을 도모하기 바란다.133) 위 효유문에서 볼 수 있듯이 청송의진은 나라와 고을을 수호하자는 두 가지 목표로 창의하였다. 전자는 관제개혁과 변복령‧을미사변‧단발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직면하여 의리를 지켜 윤리와 강상을 회복하자 는 근왕주의적 충군논리에 입각한 것이었고, 후자는 안동의진의 소모장 유시연의 횡포에 대해 자존심을 환기하여 고을을 안정시겨야 한다는 위 기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청송의진은 국가에 대한 ‘위국거의’와 고을에 대한 ‘자수지계’를 목표로 창의하였다는 점에서 춘추대의론에 입 각한 근왕주의적 의병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창의장 심성지도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이 똑같다(天 理人心之所同然)”는 관점으로 춘추대의론에 입각하여 창의의 당위성을 역 설하고 있다.134) 또 이러한 춘추대의론은 창의후 3월 17일(음 2.4) 천지 신명에 대한 서효원의 「축문」과 김상길의 「창서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서효원은 「축문」에서 국왕의 의대소衣帶召가 내려진 이상 창 의는 “우리와 오랑케, 사람과 짐승의 분별(華夷人獸之辯)”을 위한 춘추대의 라고 규정하였고, 김상길은 「창서사」에서 밀지를 받은 선비의 소임은 흉 도를 섬멸하고 오랑케를 구축하는 것이라 역설하여 창의의 명분을 ‘춘추 지법春秋之法’에서 구하고 있다. 133)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음 정월 27일자. 134) 沈誠之, 「答安東義營檄文」, 小流集 卷之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