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page

제2 장 의병항쟁 / 69 김하락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 겠다”고 하여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고, 병졸 몇 사람도 김 하락의 뒤를 따랐다. 김하락이 이천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후 약 7개월 만에 의병활동의 종지부를 찍는 장렬한 순간이었다.125) 한편 김하락의진이 영덕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인근 에 전해졌다. 이에 김도현 및 안동‧영양‧선성 등지의 의병들이 영덕으로 이 동하였으나, 이미 김하락의진은 와해된 후였다.126) 김하락이 전사한 뒤 지 도자를 잃은 잔여 의병은 산발적이나마 일정 기간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마) 해산과 화전등전투 청송의진의 영덕출진소는 6월 28일(음 5. 18)에는 영덕으로 진출한 김 하락의 이천의진과 합세하여,127) 흥해‧영덕‧영해‧안동의진과 연합하고 7월 14일(음 6. 1) 영덕전투에 참가하였다.128) 그러나 이천의진의 김하락이 전사한 뒤 영덕에서 귀환하였다. 청송의진은 7월 20일경 청운역에 진을 쳤고,129) 김도현도 영덕에서 가 산佳山‧창수蒼水‧소계笤溪 등지를 거쳐 7월 20일경 상덕천上德川으로 들어 와 진을 치고 있었다.130) 한편 김하락의 전사 뒤 큰 손상을 입은 이천의 125)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15쪽. 126)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38쪽. 127)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11-613쪽. 128)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857쪽. 129) 趙性吉, 「丙申年倡義記」, 白雲詩集 (미간행 필사본). 130) 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 독립운동사자료집 제2집, 독립운동사편찬 위원회, 1970, 7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