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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65 점령하였다. 6월 18일(음 5.8) 경주성전투慶州城戰鬪에서 의병들이 승리하 자 청송‧ 영덕지역의 의병들도 경주성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118) 그러 나 6월 22일 대구부 소속의 관군과 안강 주둔 안동친위대安東親衛隊가 연 합하여 경주성을 공략하자 6월 23일 경주연합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퇴하였다.119) (라) 흥해‧영덕출진소의 설치와 영덕전투 감은리전투 이후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에 출진소를 설치하고 활동하 던 중, 5월 25일(음 4.13) 본진을 해산하여 군내 8면으로 진영을 분산하 였다.120) 청송의진은 분진 이후에도 흥해와 영덕의 출진소를 단위로 경 주‧흥해‧영덕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송의 진은 6월 15일(음 5.5) 이천‧의성의진과 함께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하여 6월 18일(음 5. 8) 경주성전투에 참여하였다. 경주성전투에서 패전한 김하락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達城(6.23)- 기계杞溪(6.24)-흥해興海(6.25)를 경유하여 영덕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 중 기계에 이르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차츰 합세해 왔다. 흥해‧청하에서는 다 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흥해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탄약을 조달하 는 등 의진은 차츰 정비되어 갔다.121) 김하락은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으며, 6월 28일(음 5. 18) 청송의진 과 합세하였다.122) 그리고 6월 29일에는 영덕 장사를 거쳐, 7월 2일 영덕 118)《東京朝日新聞》 1896년 7월 3일자(柳漢喆, 「金河洛義陣의 義兵活動」,《한 국독립운동사연구》제3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33쪽). 119)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11쪽. 120)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13일자. 121)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