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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63 (다) 경주연합의진과 경주성전투 경주지역과 청송의진은 창의 초기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감은리전투 이후인 5월 25일(음 4.13) 청송의진은 본진을 해산하여 군내 8면으로 진영 을 분산하였다.112) 이러한 상황에서 청송의진은 6월 15일(음 5.5) 이천‧의 성의진과 함께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하고, 6월 18일(음 5.8) 경주성전투에 참여하였다. 즉 6월 15일 의성연합의진의 주축이었던 이천의진의 김하락 을 비롯하여 의성의진의 김두병, 청송의진의 홍병태 등이 경주에 도착하자 경주지역의 유림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 등이 찾아와 연합의진의 결성을 제의하였던 것이다.113) 이에 김하락도 흔쾌히 받아들여 새로운 편제의 경주연합의진이 조직되었다. 경주연합의진의 지도부 조직구성을 살펴보면 크게 이천의진에서 참여한 인 물, 의성연합의진에서 참여한 인물, 경주에서 새로 참여한 인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천의진에서 참여한 인물은 창의대장을 맡은 김하락을 비롯하여 좌익 안옥희‧우익 안재학‧우봉 이상태 등이며, 조성학은 직책을 맡지 않았 으나 전투과정에서 주요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 의성연합의진에서 참여한 인물은 의성의진의 후군 김두병,114) 청송의진의 우선봉 홍병태 115) 두 사람 이 보이는데 미약하나마 의성연합의진의 맥락이 계속 이어져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는 경주에서 새로 참여한 인물이고, 나머지 참모 장상 홍(흥해 출신)‧참모 이우정(흥해 출신)‧중군 이익화(울산 출신)‧선봉 이용 관(울산 출신) 등이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참가하고 있다.116) 112)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13일자. 113)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08쪽. 114)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03쪽. 115)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08쪽. 116)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