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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61 李景植‧집사 윤경승尹景昇은 포정 60여 명을 거느리고 명당동 연안에 도착 하여 감은리 뒷산으로 올라 합류하였다.107) 청송‧이천‧의성 세 의진은 계속 적을 추격하여 적병 10여 명을 죽였다. 이때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마침내 군대를 산 아래로 퇴각시켜 옥현玉峴에 유진하였다. 산위의 적들은 감은리에 방화를 하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았고 포성은 땅을 진동하여 그 참상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108) 이리하여 연합의진은 회군하여 이천의진 2대와 청송의진이 본진을 파수 하고 모든 의진은 문거로 물러나 유숙하였다.109) 관군은 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의성‧신녕 등지로 퇴각하였다. 이튿날 5월 15일(음 4.3) 청송의진의 포정 60명은 근곡에서 아침을 먹었 다. 오전에 부서府西 외방장 심의철이 친군 10여 명을 거느리고 도착하였고, 현 5면의 면군이 사방에서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피란을 떠났던 사람들도 산으로부터 돌아왔다. 오후 중군 김대락과 진무 정진도를 감은리 에 보내 위무하게 하니 한 마을이 모두 불타고 남은 것은 단지 6‧7가구뿐 이었다. 이천의진과 의성의진의 의병 수백 명이 안덕 신시장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의성의진의 병졸은 겨우 16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청송의진의 중군 김대락이 군문집사 박봉의朴鳳儀로 하여금 양진을 위무하기 위해 네 동이 의 술을 공궤供饋하며 전별하였다.110) 의성의진의 김상종과 이천의진의 김하락은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수습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이날 오후 의 107)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2일자; 吳世魯, 「丙申年日記」, 仁山先生文集 卷之一. 108)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2일자; 吳世魯, 「丙申年日記」, 仁山先生文集 卷之一. 109)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02쪽. 110)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3일자; 吳世魯, 「丙申年日記」, 仁 山先生文集 卷之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