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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청송의 독립운동사 4월 초 1일 계속 행진하여 大谷이라는 촌락에서 조반을 하였다. 그때 의 성에서 패전한 군사 2인이 왔기에 급히 의성 대장의 거처를 물으니 “군 사 50명을 거느리고 청송으로 진영을 옮겼다”고 한다. 급히 군사를 재촉 하여 和睦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는데, 의성진중으로부터 급보가 왔다. “병정 100여 명이 의성 鼎峴으로부터 와 본진을 습격하려 드니 속히 와 서 구원해 달라” 하므로, 우리 군사는 곧 의성진영으로 향하여 드디어 백사장에 주둔하였다. 나는 具然英과 더불어 의성 대장 김상종을 찾아가 보고, 합세하여 적을 토벌할 계책을 세웠다.100) 4월 초 1일 의성진에서 사통이 왔는데, 말하기를 “鄙陣의 근일 낭패는 척후의 보고가 있어 알 것입니다. 적병은 졸지에 이르렀고, 비가 와서 우 리 포는 젖어서 쏠 수가 없게 되었다. 저들의 전력은 우리보다 갑절이나 앞섰다. 한 번 패하여 전열이 흐트러짐에 다시 수습하기 어려워 마침내 이 지경이 되었다. 대저 한가지 의리로 일을 도모하는 처지로써 엎드려 청하오니 피곤한 새와 쫓기는 토기를 구하는 심정으로 용납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통기하였다.101) 당시 청송의진은 대구 관군의 움직임과 의성의진의 황산전투 참패 소 식을 듣고 관내 방비에 힘쓰고 있었다. 이때 의성의진의 군사 80여 명과 이천의진의 군사 100여 명이 화목 문거에 유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련군관 이교식李敎植을 보내 맞이하였다.102) 이리하여 이천‧의성‧청송 3의진의 연합이 성립되어 청송군 현서면의 문거역에서 1박하였다. 물론 3의진이 합세하기는 하였으나 조직의 독립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감은리전투는 1896년 5월 14일(음 4. 2) 연합의진이 청송군 안덕면 감은 리에서 관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였다.103) 연합의진은 관군 170여 명이 100) 金河洛, 陣中日記 , 1896년 4월 초1일자. 101)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1일자. 102)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1일자; 金河洛, 「陣中日記」, 독 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00쪽. 103) 柳漢喆, 「金河洛義陣의 義兵活動」에서는 “城隍峴戰鬪”라고 하였으나 이 것은 金河洛의 陣中日記 를 자료로 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청송 지역에서는 “甘隱里戰鬪”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