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page

5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소모장 홍병태가 전사하였다.98) 이와 같이 청송의진은 분진 이후에도 흥해와 영덕의 출진소를 단위로 경주‧흥 해‧영덕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상과 같이 청송의진은 주변 의진과 격문이나 사통을 끊임없이 주고 받았으며, 청송‧경주 등지에서 두 차례에 걸친 연합의진에 참가하였다. 특 히 감은리전투와 경주성전투에서는 전투의병으로서 두드러진 활동을 전 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흥해의진이나 영덕의진과는 긴밀한 협조체제하에 흥해출진소와 영덕출진소를 설치하여 서로 지원하였고, 나아가 영덕전투 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나) 삼진연합과 감은리전투 의성의진의 김상종 金象鐘은 5월 10일(음 3. 28) 황산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남은 군사를 이끌고 고무곡鈷鉧谷‧누실累實‧공곡孔谷을 거쳐 5월 13일 (음 4. 1) 청송으로 들어가 화목‧신시 등지를 전전하였다. 이 때 의성의진 은 이미 청송의진 및 이천의진과 연합을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 안동에서 연합의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 한 김하락의 이천의진은 호좌의진의 서상렬과 결별하고, 1896년 4월 28일 의 성에 도착하여 금성면 금성산金城山과 비봉산飛鳳山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수정사水淨寺에 진지를 정하였다. 우선 김하락은 5월 9일(음 3.27) 의흥을 공략하여 무기와 화약을 대여섯짐 가량 확보하였다.99) 이러한 때 에 군위에 주둔하고 있던 30여 명의 관군은 5월 10일(음 3.28) 의성의진 98)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857쪽. 99)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5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