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page

제2 장 의병항쟁 / 55 니 고로 군정을 뽑아 40리 지경으로 내보냈으나 약한 세력으로는 실로 저항하기 어려우니 鄙陣에서 貴陣은 가까운 땅이고 같은 의병이라 전에 급한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 약속한 고로 이에 사통을 보내니 도착하 는 즉시 정예군포 5~60여 명을 파송하여 위급한 처지를 구해 주면 다 행이겠다”고 하였다. 4월 초9일 영덕사통이 또 이르러 말하기를 “금월 초8일에 청하사통이 도달하였는데 사통의 내용은 경병 63명이 처음 경주부에 들어와 옥산의 李覺壽를 포살하였고, 흥해로 향하여 서서히 영덕으로 들어온다 하는 고로 군정을 뽑아서 남면 장사 땅에 옮겨 주둔하였으나 힘을 헤아려 보 니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이에 사통을 보내 바라오니 모름지기 정예병을 뽑아 파송하여 이웃땅의 급함을 구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읍 니다”고 하였다.93) 5월 22일(음 4.10) 청송의진은 우익장 권성하‧후방장 장무호‧참모 조광 규‧종사관 심모‧서기 윤효업을 파송하여 포군 3초를 이끌고 영덕에 가서 후원토록 하였으니 영덕출진소이다.94) 영덕출진소가 저녁에 지품知品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영덕의진은 원척元陟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12명의 부상자를 낸 채 도피한 뒤였다.95) 이에 영덕출진소는 회진하고 말았다. 감은리전투 이후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에 출진소를 설치하고 활동하던 중, 5월 25일(음 4.13)에는 본진을 해산하여 군내 8면으로 진영을 분산하였 다.96) 이러한 상황에서 청송의진은 6월 15일(음 5.5) 이천‧의성의진과 함 께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하여 6월 18일(음 5.8) 경주성전투에 참여하였다. 청송의진은 6월 28일(음 5.18)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합세하여,97) 흥해‧영덕‧영해‧안동의진과 연합하고 7월 14일(음 6.1) 영덕 93)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8일 및 초9일자. 94)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초10일자. 95)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11일자. 96)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13일자. 97) 金河洛, 「陣中日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611-6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