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page

5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안동의진은 3월 14일(음 2.1) “같은 목적으로 함께 노력하니 서로 화평하 자”75)는 답통答通을 보내왔다. 또 3월 20일(음 2.7) 청송의진이 결성되자 안동의진에서는 “전자 유시연柳時淵의 망령되고 해괴한 거동을 불문에 부치고 평화롭게 일을 함께 도모하자”는 화해의 사통을 청송향회소로 보 내왔다. 이에 청송의진은 “본부에서도 역시 똑같이 앙갚음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일을 시작한 처음과 같이 강령대로만 하자”는 답통을 보내 고 있다.76) 그후 안동‧예안‧진보의진과 더불어 청송의진의 협조체제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빈번히 사통이 오고가며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3월 26일(음 2.13) 안동‧예안‧풍기‧순흥‧영주‧봉화‧호좌 등 7읍 의진의 예천회맹이 이루 어진 뒤, 3월 29일(음 2.16) 안동‧예안 등의 배후를 방어하던 진보의진에 대해 지원을 요청하였고, 안동의진의 소모장이 경주지역으로 파견되자 포정 을 보내 호송해 달라는 안동사통이 도달하고 있다.77) 이에 3월 31일(음 2.18) 청송의진에서는 경주로 향하던 안동 소모장 유창식柳昌植을 호송하 고,78) 그 식비를 부담하기도 하였다.79) 또 5월 2일(음 3.20) 안동의진의 외방장 이모 李某와 소모장 유벽호柳璧鎬가 병정 10여 명을 거느리고 청송군 의 청운역에 들어와 소모를 요청하였으나 거절하기도 하였다.80) 뿐만 아니라 4월 2일(음 2.20) 안동의진은 대구의 관군이 군위‧의성을 거쳐 안동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청송의진에 군인과 탄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81) 이에 청송의진은 안동부를 응원하기 위해 군사를 75)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초1일자. 76)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초7일자. 77)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16일자. 78)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18일자. 79)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19일자. 80)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3월 20일자. 81)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