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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47 청송의진의 진법과 사격연습은 열악한 무기를 소지한 오합지졸의 의병을 비교적 정예의 군포로 정비함으로써 전투의병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나) 군수금의 조달 한편 청송의진의 지도부인 양반유생들은 의병투쟁을 전개하는데 필요 한 재원을 확보해야만 했다. 일반적으로 을미의병에서 지도부인 양반유생 들은 춘추대의의 명분에 따라 기의起義하였으나, 병사부는 경제적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했다. 즉 의병에 참가하는 포수나 농민들이 양반유생들의 명분에 동조하여 움직일지라도 기본적으로 식사의 제공 외에 가족을 부 양하는 데 필요한 급료의 지급이 필요하였다. 포수들의 전투력에 대한 급 료와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병사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의 지급은 을미의 병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64) 청송의진의 경우에도 군인에 대한 급료로 초기에는 매일 1냥兩 5전錢을 지급하였으나, 숫자가 늘어나면서 1냥으로 줄여 나가고 있다. 이러한 급 료의 지급은 엄청난 부담이었으나 의진을 움직여 나가는 데는 필수적인 것이었다.65) 64) 을미의병시 각 의진이 급료를 지급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진주의병장 노응규는 화승총을 휴대한 군사들에게 한달에 엽전 2관문과 쌀 6말을 급료로 지급하였고, 또 요해처를 방수하는 포군에 대해 하루에 매인 당 1냥 8전씩 지급하였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8, 227‧249‧265쪽). (2) 강릉의병장 민용호는 군사들에게 매일 쌀 두되와 엽전 30문을 지급하였다 (閔龍鎬, 復齋集 , 278-279쪽). (3) 金山義陣의 경우 砲丁이 70여 명이었는데, 월료로 700金을 지급하였다 (呂中龍, 甲午‧丙申日記 ). (4) 奉化義陣의 창의장 琴錫柱의 경우 예천회맹에 참여하여 태봉전투에서 참 패한 뒤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포군 1인당 2錢 5分을 出給하고 있다(琴錫 柱, 丙申二月日記 ). 65)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