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page

제2 장 의병항쟁 / 41 (나) 병사부 청송의진의 병사부 구성은 매우 주목된다. 병사부는 대체로 포병과 보부 상, 그리고 농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적원일기 에 의하면 포병 100여 명을 포함하여 10초哨(1초=18명) 약 180여 명으로 나타나고 있다.52) 포병은 청송의진에서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전투 요원이었다. 이들은 용병적 성격을 가진 포수‧농민으로 관군의 대열을 이탈하였거나 반농적인 포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약 100여 명 으로 구성된 청송의진의 포병들은 자신이 가진 전투능력에 대해 일정한 대가를 받고 참여하고 있다. 1896년 4월 24일(음 3. 12) 의진 지도부가 군 비를 절약하기 위해 1냥 5전에서 1냥으로 군인의 급료를 줄이려 하자 포 병들은 이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는데서, 그 성향을 알 수 있다. 본읍이 창의 초에 군인의 급료로 매일 1냥 5전을 준 것은 군심을 수습하 고 병정을 모집할 계책이었다. 그러나 이제 군대의 수가 十哨나 되니 용 도가 날로 궁색해져 부득이 각 영에서 하나 같이 모두 급료를 감하여 군 료를 1냥으로 정하였다. 하루는 100여 명의 포정이 일제히 나아가 항의 하기를 “소인 등은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의진을 따른 것이 오늘로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日料에서 남는 것이 있으면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양육할 계획이었습니다. 이제 이처럼 급료를 감하여 소인들의 가속들이 굶어 죽을 처지에 닿았으니 소인 등은 의거를 따를 수 없다”고 하고, 곧 행장을 꾸려 강을 건너 백사장에 결진하는 고로, 군문집사에게 분부하여 효유하여 돌아오게 한 즉, 또 해진하여 곧바로 청운으로 올라가서 집사 에게 방포하겠다고 까지 하니 그 죄상을 찾은 즉 창끝을 돌릴 병정이 다 수 있을 것 같으니 섣불리 서둘러 경계하면 일이 있은 즉 어찌 두 사람 의 병정인들 우리를 따를 것인가. 마침내 沈能璋으로 소모장을 삼고 전 방장 尹楨禹로써 각 영의 집사를 거느리고 즉각 포착해 오니 시각이 이 미 삼경이었다.53) 52)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3월 12일자. 53)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