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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교吏校들도 창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청송군의 행정조직을 의진이 장 악하게 된 것이다. 적원일기 에 의하면 향리들도 의연금을 납부하는 등 의진에 협조하는 상황이었고,32) 면임과 집강의 협조하에 외방장이 도적 을 방비하는 등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33) 청송의진은 1896년 5월 25일(음 4. 13) 관군의 추적과 고종의 칙유勅諭에 따라 본진 해산을 결의하고, 8면面으로 분진하여 외방장을 중심으로 하는 면군체제로 전환하였다. 상영이 제영과 더불어 일을 꾀하여 이르기를 “이제 적병이 승세를 타고 의진은 쫓기게 되었다. 고종의 칙유 또한 이처럼 간절하고 돈독하기가 하늘의 조서를 독봉하는 것과 같다. 만약 약하고 외로운 형세로 오래 동 안 읍내에 주둔할 것 같으면 앞으로 불행이 있을 것이고 화가 조만간 닥 칠 것이니 곧 八面으로 分陣함만 못하리라. 겉으로는 의병을 파하는 것 처럼 보이고 안으로는 상응하여 충실하게 함이 십분 완전한 계책일 것이 다. 드디어 분진하기로 결의하여 부장 趙性璞은 현내를 맡게 하고, 南昇 喆은 현동과 현남 두 면을 맡게 하고, 현북은 중군 金大洛, 현서는 선봉 장 洪秉泰, 부동은 우익장 徐孝信, 부내는 좌익장 權成夏, 부서는 소모장 沈能璋에게 맡기고 각각 이속과 서기 1인을 두었다.34) 이와 같은 면군체제는 종래 부 4면과 현 5면에 각기 두었던 외방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성한 것이었다. 면군체제는 외방장 아래 이속吏屬과 서기 각각 1인으로 구성되어 면임과 집강의 협조를 받아 혼란기의 군사‧ 행정적 공백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면군체제하에서 청송의진은 6월 17일(음 5. 7) 경주연합의진의 경주성전투에 참가하였고, 7월 11일(음 6. 1) 영덕전투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32)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2월 13일자. 33)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3월 초6일자. 34)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