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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33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시 부장 조성박이 조성효趙性斅로 교체된 경우는 있었 으나, 그외 큰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참모나 서기, 그리고 종사관의 경우, 시기에 따라서 출입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대체로 양반유생들이 담당하였다. 더욱이 청송의진은 감은리전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관군과 전투시 에는 진용을 전투대형으로 편성하기도 하였다. 초2일 辰時에 본읍의 현북 속곡으로 이진하였다. 식후에 흥해출진소에서 첩보가 래도하였는데, 다 돌려 보기도 전에 홀연 급보가 있어 보니 적진 이 바야흐로 노상으로 온다고 하니 형세가 급박하게 되었다. 고로 점심 식사도 끝내기 전에 군대의 대오를 정돈하여 응전하려 할 때에, 또 급보 에 이르기를 이천과 의성 양진이 먼저 이미 접전하고 있는 까닭에 대장 은 근곡에 머물고 중군 金大洛‧진무 鄭鎭燾‧소모 沈能璋 ‧참모 吳世魯‧ 서기 尹道爀‧외방장 安秉龍‧군사 李景植‧집사 尹景昇으로 하여금 포정 60명을 거느리고 도보로 곧장 명당동 연안에 이르렀다.30) 한편, 청송의진은 부府 4면面에 해당하는 부내府內‧부서府西‧부남府南‧부 동면府東面과 현縣 5면面에 해당하는 현내縣內‧현동縣東‧현남縣南‧현북縣北‧ 현서면縣西面에는 각기 외방장外防將을 두고 있었다. 각 면의 외방장은 친 군親軍을 거느리고 면임面任과 집강執綱의 협조하에 지역의 장정壯丁으로 이루어진 대오를 편성하였다.31) 이것은 군사적 의미에서 의진의 외곽을 형성하고 있는 면군체제面軍體制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면군체제하에 서 외방장은 의병 본진의 외곽부대로써 정보수집‧지역방어‧본진후원 등 의 군사적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면의 행정은 외방장을 중심으로 한 의진의 통제하 에 놓이게 되었다. 창의 초기에 이미 청송군수 남유희가 도망한 상태에서 30)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4월 2일자. 31)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3월 초8일‧초9일‧30일, 4월 초3일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