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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 / 청송의 독립운동사 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 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 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 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 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성태는 이 때 서기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 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 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 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84. 조현욱趙炫郁 : 1854. 1. 2~1922. 2. 19.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화목장 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무계동武溪洞의 신태휴申泰烋·조병국趙炳國에게 격문을 보내 어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주민 50여명을 모으고, 다시 현서 면사무소에 있던 구장 및 유지들을 종용하여,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시장으로 몰려갔다. 도중에 많은 군중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화목주재소에서 출 동한 3명의 일본경찰의 무력행사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에 병탄된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비분하여 투 신 순국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