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page

35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을 겪는 동안 끝까지 조성길은 의진과 함께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下卷 17쪽, 백운유고. 80. 조성눌趙性訥 : 1835~1902. 12. 14.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 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 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 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 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 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 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조성눌은 이때 백의종사로 선임되 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 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 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 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81. 조성로趙性魯 : 1839~1908. 2. 12.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 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 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 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 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 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 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