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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55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判決文(1919. 5. 5 大邱覆審法院), 高等警察要史 35쪽, 獨立運 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38·439쪽. 78. 조성규趙誠奎 : 1853~1926. 3. 28.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 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 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 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 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 하고 진용을 갖추었다. 조성규는 이때 직임록職任錄을 작성하였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 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79. 조성길趙性吉 : 1860. 10. 1~1917. 9. 18.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청송·영 덕·흥해興海 등지에서 격전을 벌이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중 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고종의 해산 조칙을 받들어 은거하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산남의 진山南義陣이 조직되고 모병활동이 전개되자, 조성길은 서종락徐鍾洛·남 석인南錫仁·남석우南錫佑 등과 함께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상 중喪中이었으므로, 다만 「청조문請助文」을 각지에 발송하여 의병을 소집 하는 등 간접적으로 의병활동에 협조하였다. 이후 1907년 9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의병장 정용기 가 순국하고, 11월 정환직마저 교전 중에 체포되어 순국하는 등의 불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