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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 청송의 독립운동사 76. 조독호趙篤祜 : 1843. 11. 6~1914. 9. 8.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독호는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896년 3월 심성지沈誠之가 경북 청송에서 100 여 명의 병력을 모아 거의하자, 그는 의진의 참모參謀로 활동하였다. 청송의진은 1896년 거의 후 조직을 갖추고, 5월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감 은리甘隱里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등 청송일대에서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감행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1896. 1). 77. 조병국趙柄國 : 1883. 3. 26~1955. 3. 15. 1919년 3월 26·27일의 현서면 화목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 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간절히 소 망하던 차에,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으로부터 격문을 전해 받 고 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화목장터에서 조현욱·신태휴申泰烋 등과 함께 수백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를 전개하였으나, 이때의 화목주재소에서 3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인물 2명을 체포하 고 총검을 휘둘러 시위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 다시 말을 타고 수십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 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화목장터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연도에 있던 군중이 시위대열에 합세하여 군중은 6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 자 청송경찰서에서 조선인 경부와 3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그를 체포하 려 하였다. 조병국은 시위군중과 함께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을 저지 하는 매국노를 죽이라고 외치며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야만적 인 발포로 4명이 부상을 당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었 으며, 이해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