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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5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74. 조근백趙根伯(이명; 性逸‧勤伯) : 1872. 3. 13~1908. 6. 20. 1906년 정용기 鄭鏞基가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영양·청송·진보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을 벌였다. 그뒤 이듬해 7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정용기 의병장이 전사하고 의진 이 해산되자, 은둔하였으나 1908년 6월 20일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피체, 현장에서 총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下卷 69쪽, 咸安趙氏大同譜 第3篇(1979. 11. 30) 墓碑文. 75. 조능호趙陵祜 : 1852. 1. 17~1925. 1. 31.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 을 전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 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 송향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 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 를 소모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능 호도 이때 종사에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 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 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 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 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