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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 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 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 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 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 모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규락은 이때 지휘사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 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 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 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73. 조규진趙奎震 : 1850~1903. 6. 1.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 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조규진도 이때 의진에 참여하였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 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 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 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