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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49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67. 이형李瀅 : 1886. 9. 20~1949. 2. 15. 1919년 3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화 목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조현욱趙炫郁·신태 휴申泰烋 등과 같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3월 27일 화목 장날에 운집한 다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를 주도하다가 피체되었다. 동년 4월 9일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으며, 5월 31일에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判決文(1919. 5. 2 大邱覆審法院), 判決文(1919. 5. 31 高等法院). 68. 임용상林龍相(이명; 炳五‧中虎) : 1877. 5. 22~1958. 1. 5.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영덕에서 김재서金在瑞 등과 더불어 거의하여 동해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청하淸河·영덕 강구江口 등지에서 일본 군의 주둔소를 습격하고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되자, 그는 이에 합세하여 유격 장 겸 도총장都總將으로 임명되어 청송‧영천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을 격 살하였다. 또한 1907년 의병 수백 명을 인솔하고 흥해興海지방에서 일본 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1907년 12월 정용기가 전 사하고,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대장으로 추대되자, 임용상은 총장總 將이 되어 청송‧청하‧영덕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10년 봄 그는 해산상태에 처해 있던 옛 산남의진을 다시 정비하고 스 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군자금을 조달하고 무기를 획득하여 청송‧ 의성 등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평전투安平戰鬪에서 체포되어 1910년 7월 25일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