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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이와 같이 국가에 대한 ‘위국거의’와 고을에 대한 ‘자수지계’라는 명분 과 목표하에 향회의 분위기는 의병소의 설치로 가닥이 잡혀갔다. 더욱이 창의를 서두르게 되는 것은 향회에 모인 양반유생을 비롯한 회원들이 유 시연의 횡포를 더 이상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창의 3월 12일(음 정월 29일) 유생 심관지‧서효원 등의 지도로 향회에 참석한 유생들은 “만약 시간 을 지체할 것 같으면 고을을 지탱할 수 없 을 것이며, 시정의 물의도 아울러 소란 하고 들끓어 촉박하 니 부득이 의병소를 설치”하기로 의론을 정함으로써 창의하 였다. 이들은 객사客 舍에서 심성지를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고,20) 조성규趙誠奎와 권복규權復奎 로 하여금 임파록任爬錄을 작성토록 하였다. 이리하여 3월 15일(음 2.2) 20) 청송의진의 창의장 沈誠之의 본관은 靑松, 자는 士行, 호는 小流이다. 그는 9세에 母를 여의고, 11세부터 族兄 松窩公에게 수학하고, 1854년(甲寅) 24세 시에는 호서지방의 화양동을 들러보고 송자전서 와 언행록 을 읽었다. 그 뒤 문을 걸고 독서에 전념하여 “易學變化之理”와 “聖學心性之說”에 통달하 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888년(戊子) 58세에 천거로 義禁府 都事가 되 었고, 1894년(甲午)에는 敦寧府 都正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沈 誠之, <行狀>, 「附錄」, 小流集 ). < 청송의진 결성의 출발점이 된 청송향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