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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47 등지에서 의려義旅를 소모하였다. 그러나 남석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그는 중도에서 되돌아왔다. 한편 정용기의 순국으로 부친인 정환직鄭煥直 이 뒤를 이어 의병을 통솔하게 되자, 그는 중군中軍이 되어 분전하였다. 그러던 중 정환직 대장마저 청하淸河 지방에서 체포당해 처형되었다. 이 후 장기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군 2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청하에서는 적 4명을 격살擊殺한 뒤, 의병을 이끌고 울산蔚山을 향해 진 군하던 중 복병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뒤 후일을 기약하며 고향으로 내려와 삼유산三踰山아 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9년 2월 체포되어 3년형 을 선고받았다. 이석은 옥고를 치르던 중 탈옥하여 도주하였으나, 다시 체포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141·143·144쪽,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79쪽. 64. 이석이李石伊 : 1879~1910. 이석이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활동하다가,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산남의진에서 활동하던 이석이는 1907년 정용기가 일경에 의해 순국하 자, 독자적으로 의진을 결성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7 년 음력 11월 13일 17명의 부하 의병들과 함께 경북 청하군淸河郡 죽남 면竹南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 같은 해 음력 12월 9일에는 200 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청하군 청하읍을 습격하였다. 아울러 1908년 음력 2월 19일 부하로 하여금 일본군 밀정 이명갑李明甲 을 처단케 하는 등 군자금 징수와 친일파 처단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피체되어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3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2卷 41쪽, 獨 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36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 勳處) 別集 第1輯 484·525·526·625쪽, 每日新報(1913.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