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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촌을 방문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한편, 동포유학생 및 사회인사들을 대상으로 동지규합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또한 일제의 식민정책인 징병 제도 및 학병제 등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활동이 발각됨으로서 그는 1943년 8월에 동경헌병대에 의해 피체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동년 11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 반으로 소압巢鴨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런데 이때 혹독한 고문으로 정 신적 질환을 앓게 됨에 따라 1944년 10월에 가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 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동경구치소 간수장 增山吉三郞의 차입영수증 3매(1943. 12. 20‧1944. 4. 28‧1944. 7. 26). 62. 이기찬李起璨 : 1853. 10. 12~1908. 1. 13. 1896년 경북 김천에서 허위許 蔿·조동석趙東奭·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거의하여 금릉金陵을 점령하고, 포 군砲軍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무장시킨 후, 대장으로 추 대되었다. 그리고 대구부 진공계획을 세웠으나, 관군이 먼저 출동하여 성주진星州 陣을 공격하였다. 더불어 관군이 연합하여 대공세를 펴게 되자, 이기찬 의 진공계획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같은 해 4월 황제의 해산 조칙이 내리자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 였다. [참고문헌] 家狀(筆寫本, 1931. 6, 이강하 작성), 지산유고(이기찬, 筆寫本) 第3卷 日記,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243·244쪽. 63. 이석李錫 : 1881. 2. 15~1909. 2. 14. 1906년 정용기鄭鏞基·이한구李韓久 등이 산남의진을 결성하자, 여기에 동지를 참여하였다. 그는 초장哨長의 직에 임명된 후, 고군분투한 공이 인정되어 좌영장左領將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1907년 이석은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더불어 청송‧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