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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41 이끌고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송의진은 마 평馬平과 경주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청송의진은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 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이후 오세로는 창의록인 적원 일기赤猿日記 를 저술하여 의진의 활동상을 후세에 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仁山先生文集(1978) 上卷 58-60쪽. 54. 우영조禹永朝(이명; 永祚) : 1870. 10. 15~1963. 3. 2. 1906년 5월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창의되자, 우영조는 진보지방의 소모책임을 맡았다. 이후 정용기의 체포 및 의진해산 등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용기가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1907년 8월 의진을 재구성하자, 다시 입진하여 신성薪城·청송·자양紫陽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1907년 10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정용기가 순국하고, 그의 부친 정환직이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우영조는 신녕薪寧·의흥義興·안동·청송·청하淸河 등지에 서의 대소전투에 참가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2월 11일 정환직이 또 체포되어 순국하자, 그는 동부의진의 서종락徐鍾 洛과 함께 활약하였다. 즉 1908년 2월 이재원李在元으로부터 소 1필을, 박 태래朴泰來로부터 70여 명의 급식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체포되어 1910년 2월에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 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義陣遺史 376·378쪽, 山南倡義誌 上卷 59쪽, 영양문헌록 982쪽,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 1910. 2. 16), 獨立運動史(國家 報勳處) 第1卷 351쪽. 55. 윤기열尹基烈(이명; 武建) : 1878. 3. 23~1917. 3. 15. 1906년 산남의진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