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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35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43. 신태휴申泰烋 : 1870. 8. 3~1931. 6. 6. 1919년 3월 26일, 현서면 화목장 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신태휴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곳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간 절히 소망하던 차에,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으로부터 격문 을 전해 받고, 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1시경, 화목장터에서 조현욱·조병국趙炳國 등과 함께 수백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 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高等警察要史 35쪽, 判決文(1919. 5. 5 大邱覆審法院), 判決文 (1919. 5. 31 高等法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438·439쪽. 44. 신필호申弼鎬 : 1834~1900. 8. 1.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 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은 토 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신필호도 이때 참여하여 백의종사白衣從 事에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