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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 청송의 독립운동사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은 토적복수 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 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 營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신동호도 이때 참여하여 참모로서 의진좌목義 陣座目을 만드는 등 조직의 골격을 갖추는데 기여하였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1896년 4월 청송의진은 영덕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 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 42. 신익한申翊漢 : 1838~1906. 3. 21.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 개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 들어 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徐孝源을 의영도지 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였다. 이어 청송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 를 소모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신익한 은 이때 의진에 참여하여 종사從事로 선임되었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김상종金象鍾 및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과 연 합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관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 인부人夫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 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5월 같청송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 의진과 연 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고종의 해산 조칙에 따라 해진解陣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