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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31 36. 서종락徐鍾洛(이명; 周一) : 1874. 10. 3~1940. 7. 20. 산남의진山南義陣 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 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아 의거할 것을 지시하여서 형 성된 의진이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계획 을 정하고 각 지방 대표를 임명하여 그들이 자기 고을에서 의병을 모으 는 책임을 맡겼다. 이때 서종락은 남석구南錫球·남석인南錫仁·임용상林龍 相·심일지沈一之 등과 청송지역 소모책임을 맡았다. 산남의진은 병력 2천 명이 넘자 북진을 계획하고 영덕의 신돌석의진申乭石 義陣과 손을 잡고 청하읍을 공격하였으며, 이어서 영천 자양紫陽에서 일본 군과 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대파한 후 진로를 보현산맥으로 돌려 청송으로 향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다시 침공해 와 신성新城에서 대격전을 치렀다. 이후 산남의진은 휴병하였다가 1907년 4월에 다시 거병하였으며, 8월 군 대해산 이후 많은 해산 군인들이 들어와 의진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 다. 그러나 정용기·이한구·손영각·권규섭 등 주요 간부진이 모두 전사하 였다. 정환직이 대장이 되어 9월부터 11월까지 지휘하였으나, 접전 중 병을 얻었다. 더욱이 정확직은 병을 치료하다가 12월 11일 체포되어, 12월 11일 영천 남교南郊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1908년 영덕의진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서종락은 남석구와 더 불어 의진을 재구성하여 진의 동쪽은 서종락이 서쪽은 남석구가 맡아 활약 하였다. 의진에는 최성집崔成執·이구옥李舊玉·이만파李萬波 등이 참여하였으 며, 각기 50명 내지 15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의성·안덕安德·포항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8년 말 경주·영천·의흥·청송의 수비대 등 합동 토벌 대를 맞이하여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에서 패전하여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 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高等警察要史 8쪽,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1卷 196쪽, 獨 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0·351·352·578·579·580·581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輯 402·762쪽, 獨立運動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