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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 청송의 독립운동사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8卷 322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16쪽, 東亞日報(1931. 10. 22), 朝鮮日報(1931. 10. 21). 34. 배연집裵淵楫 : 1878. 5. 5~1952. 1. 13.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이어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되어 갔다. 배연집은 이와 같은 민족적 위기에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입진하여 박태종朴泰宗과 함께 비안比安·의성일대에서 의병을 소모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래서 그 는 비안과 의성일대의 포수와 민병들을 무장시킨 후 산남의진에 합세하 였다. 1906년 3월 5일 의진의 규모가 갖추어지자 영천을 떠나 영해로 진출하여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과 합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청하淸河 로 진격하던 중 정용기가 체포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義陣遺史 416쪽,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0·351· 352·353쪽. 35. 배희직裵熙稷(이명; 凞稷) : 1868. 3. 29~1942. 6. 18. 청송의진에 참여 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 時淵이 청송에 들어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 이 전해지자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향교에 유생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 원徐孝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 때 배희직은 거액의 군자금을 의연義捐하여 의진편성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毛筆草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