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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29 의식 고취에 머물지 않고,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후방을 교란시키 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안동시내의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의 습격 등을 투쟁 방침으로 삼았다. 박동렬 등은 기회를 엿보면서 거사를 준비하던 중, 1945년 3월 10일 소 위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추진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그를 비롯한 단원 전원이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刑事事件簿, 安東農林學生抗日略傳(安東農林高等學校同窓會, 1978) 20쪽, 安東農林50年史(安東農林高等學校, 1983) 185·187쪽,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1991) 306쪽, 安東版獨立史(金乙東, 1985) 333·369쪽, 안동광복지사기념비(1981), 出獄紀念寫眞(1945. 8. 18 촬영). 33. 박영산朴榮山(이명; 炳坤) : 1887. 1. 2~1931. 10. 11. 1909년 만주로 망 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삼일운동 이후에는 한족회韓族會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하고 있던 이 단체는 1919년 4월 초순 이상룡李相 龍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조직한 한인자치기 구이다. 이 단체에서는 재만동포들에 대한 자치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 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보三源堡 시가에 본부인 중앙총부를 두고 그 최 고 책임자로 이탁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한족회는 지방자치조직도 체계 화하였다. 그래서 동포 1천 호마다 1명의 천가장千家長을, 1백 호마다 백 가장百家長을,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씩을 두었다. 이러한 한족회의 자치조직은 1912년부터 조직되어 있었던 부민단扶民團 등의 체제를 바탕 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박영산은 군정서軍政署·정의부正義府·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11일 반석현磐石 縣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