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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청송의 독립운동사 또 조성길趙性吉의 백운시집白雲詩集 에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안동의진 소모 유시연이 포졸 20명을 거느리고 본군에 들어 와 향청에 좌정하고 나를 불러 말하기를 “隣郡은 義陣을 일으킨 지 이미 오래되었 는데, 이 郡은 강 건너 불 보듯이 하고 있으니 무슨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러한게 아닌가. 이 郡의 軍器는 가져가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군기를 거두어가려 하였다. 18) 이에 관졸과 군민이 모여 군기를 탈환하는 한편, 3월 10일(음 정월 27일) 향중 4면에 통고하여 의진의 결성을 모색하는 향회를 개최하였다. 이 향 회에는 심관지沈灌之‧석간石澗 서효원徐孝源 등 청송군의 각 면에서 약 100 여 명의 유생들이 모였다. 이 향회가 열리기전 부동면府東面 상평上坪의 서 효원은 각 면으로 ‘효유문曉諭文’을 발하여 “위로는 대의大義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아래로는 고을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역설하고 “우리 고을의 존망은 이 두 가지에 달려 있다”고 호소하면서 모임에 참석할 것 을 촉구하였다. 즉 두 가지란 국가에 대한 ‘위국거의爲國擧義’와 고을에 대 한 ‘자수지계自守之計’였다.19) <曉 諭 文>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옳고 당연한 도리인데 이제 모름지기 조목조목 따져서 가리고 고찰할 때가 아니다. 격서(檄書)와 통장(通章)이 답지하고 있는데도 따르고 따르지 않음은 충신과 역적을 스스로 나타내 는 것이며, 틈을 보아 뒤로 물러서는 자는 병정으로 먼저 처단할 것이다. 이러한데도 한 번도 향회에 참여치 않음은 끝내 짐승의 무리로 돌아가는 것이니 옳은 일겠는가. 비록 이해를 따져서 말하더라도 우리 고을은 거의 백 리나 되는 고을인데 마음을 같이하여 힘을 다한다면 대체로 우리 구 18) 趙性吉, 「丙申年倡義記」, 白雲詩集 (미간행 필사본). 19) 沈誠之, 赤猿日記 (필사본), 1896년 음력 정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