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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을 전개하여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 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 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 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이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 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 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민춘기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 들을 중심으로 세계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 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피체되었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15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으로 인해 1945년 10월 9일 형이 집행정지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在所證明書(大阪刑務所, 1995. 4. 20), 昭和特高彈壓史(明石 博隆) 下卷 52-54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343-1345쪽. 32. 박동렬朴東烈 : 1927. 8. 29~ . 1943년 8월 경, 경북 안동의 안동농림학 교安東農林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회복연구단朝鮮恢復硏究團 의 단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박동렬을 비롯한 안동농림학교의 제8·9·10회생들은 일제의 부당한 식민 지 통치에 항거하기 위해 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