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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25 26. 남정철南井喆(이명; 定喆) : 1888. 2. 5~1970. 9. 25. 1906년 정환직鄭煥 直의 명을 받고 영천永川으로 하향하여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 을 조직하자, 남정철은 자진 입진하여 종사從事로 임명받았다. 그는 주로 적의 형세를 수색하여 본진에 정보를 제보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7년 8월 이후 의진이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자 전투에 참가 하여서 입암立岩·동대산東台山·화장花壯 등지에서 전과를 올렸다. 영덕전 투에서 패전한 후에는 청송진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上卷 3쪽, 山南義陣遺史 476쪽. 27. 모충이牟沖伊(이명; 俊伊) : 1883. 4. 4~1960. 4. 19. 1906년 3월 산남의 진山南義陣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07년 10월 정용기가 순국하고 이어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정환직鄭煥直마저 순국하자, 그는 1908년 6월 박신재 朴新材와 그밖에 수명과 더불어 총검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 개하였다. 즉 경상북도 청하淸河 세목동장細牧洞長으로부터 20원을 군자 금으로 모금하였다. 이후 귀가하여 있던 중 1908년 8월 3일 밀정으로 활약하던 청하군의 소 사小事 정말범鄭末凡을 살해하였다. 이 일이 적발되어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영일군 관학산冠鶴山에서 체포되었다. 10월 20일 대법원에서 종신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12년 소위 칙령 제23호에 의하여 징역 12년형으로 감형 받았으며, 다시 1916년 소 위 칙령 제104호에 의하여 징역 9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 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 1908. 9. 4), 判決文(大邱公訴院 1908. 9. 29), 判決文(大審院 1908. 10. 20). 28. 민동호閔東鎬 : 1874. 9. 29~1928. 2. 18.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