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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 청송의 독립운동사 하여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활약하였다. 1896년 3월 안동의진의 유시연柳 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와 군기를 요구하고, 외지에서 는 격문이 내도하여 거병을 촉구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청송유림들은 향회를 개최하여 1896년 3월 심성지沈誠之를 대장에 추대하고 거의하였 다. 그는 청송의진의 참모와 서기 등 약간 명의 간부진을 선출할 때 참 모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를 훈련하는데 필요한 군량을 확보 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 하여 군량을 수집하였다. 이후 다시 참모진을 개선하였는데, 이때 남승 철은 사병도총에 선임되어 군사들의 훈련과 군율, 병사의 모집 등을 담 당하였다. 1896년 5월 14일 청송의진은 감은리甘隱里에서 의성·김하락의진과 연합 하여 관군과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연합의진은 관군 7∼8명을 사 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남승철도 사병도총으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관군 교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赤猿日記(筆寫本, 1896), 자음집(간행년도 미상) 人卷 附錄. 25. 남승하南昇夏(이명; 廷夏) : 1872~1907. 4. 9.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 되자, 시종관으로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 鏞基를 영천永川으로 보내어 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이한 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하였다. 남승하는 1906년 3월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의진을 따라 영해방면 으로 이동한 후 신돌석의진과 연합하여 전투를 치렀다. 이후 1907년 4월 청 송지방에서 계속 의병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청송군 화목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下卷 41쪽, 山南義陣遺史 459쪽, 獨立運動史(國家 報勳處) 第1卷 350·351·352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輯 392·3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