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page

부록; 독립유공포상자 열전 / 323 와서 나머지 병사들을 타일러 해산시키고 다음날을 기약하였다. 한편 부친 정환직鄭煥直의 주선으로 대구 경무청으로부터 풀려나게 된 정 용기는 의거준비를 시작하였다. 1907년 5월 이들은 강원도 강릉에서 의거 할 것을 결의하고 무기 등을 준비하였다. 기일이 다되자 정사홍이 남석인 을 찾아와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석인은 군사 30명을 모집하여 영천 거동사巨洞寺에 머물면서 정용기를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남석인은 의진을 거느리고 청송·흥해 등지의 민가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6월 정사홍과 뜻이 맞지 않으므로 포군 20명만을 거느리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가 유진하였다. 가을까지 그곳에서 유진할 생각이었으나 일본군이 눈치체면 불리할까 염려되어 영덕 입암立岩으로 가서 포병을 모집하고자 청하淸河 하옥계下玉溪에 주둔하였다. 6월 19일 적의 공격을 받고 은신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20일 체포되고 말았다. 재판 결과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끝내 대구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다. [참고문헌] 梅泉野錄 437쪽,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350·351·387쪽,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427쪽. 23. 남석태南錫台(이명; 台錫) : 1879. 4. 4~1961. 4. 12. 1906년부터 1907년 8월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자, 남석태는 소모의 임무 를 맡아 청·장년 28명을 모집하고 총기 등을 수합하였다. 그리하여 청하 淸河·영덕盈德·입암立岩 등지에서 교전하였다. 또한 서종락徐鍾洛과 의진 을 재편성하고 고와전투高臥戰鬪에서 패전하여 이름을 바꾸어 은신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山南倡義誌 上卷 3쪽, 山南倡義誌 下卷 61쪽. 24. 남승철南升喆(이명; 昇喆) : 1851. 2. 25~1922. 11. 23. 청송의진에 참가